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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나의 예쁜 쓰레기 / 디자인 인문학-최경원

최근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소품샵이

급격하게 늘었다는 것을 느꼈다.

 

 

들어가서 보니 필요한 물건이지만

디자인에 매우 집중한 물건들이 주를 이뤘다. 

 

 

그때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여기 장사가 되나?"

친구는 과연 이곳이 돈을 벌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난 생산과 소비는 균형을 이루므로

소비자가 분명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럼 어떻게 디자인에 중시한 소품샵이

실용성을 중시하는 소비와

균형을 이룰 수 있었을지 의문이었다.

 

 

오늘 책 <디자인 인문학>을 읽어보니 우리도 기술에 가려져 선택의 기준에서

배제되던 디자인이 최근 선택의 기준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디자인이 주목받은 만큼

기술은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듯 옛날 물건은 오래 쓰지만

요즘의 물건은 오래 쓰지 못한다.

 

 

예술은 기술의 발전 끝에 온다고 유명 예술 비평가가 말했다.

이를 읽고 상황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았다는 점에서

놀라움과 동시에 안타까웠다.

 

 

예술과 기술이 공존할 순 없는 것일까?

과연 예쁘기만 하다고 좋은 디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는 좋은 디자인이 장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춘수의 <꽃>에서 이름이 불리었을 때 존재하던 무언가처럼

디자인은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

그것이 존재의 의미이며,

좋은 디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대를 대변하고,

그 시대를 향한 위로를 주는

그런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건 개인적인 생각이다.

좋은 디자인을 이렇게 정의하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은

"모두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내가 만든 무언가가

세대를 대변하는 좋은 디자인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난 "좋은 무언가 "의 기준이 정해지게 된다면

큰 혼란을 야기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보았다.